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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
 2014년 03월01일 ( )  여준영의 일기  VIEW : 4,628
노예12년을 보고 나서
프레인무비 회원들께 보낸 편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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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좌석 몇개 열렸나요?
13만 정도요.
<논스톱>은?
52만 쯤..
왜 이렇게 차이가 나죠?
<논스톱>은 딱 봐도 상업영화잖아요. 극장들이 선호해요.
  
엊그제 배급팀과 나눈 대화입니다.  
  
2.
제가 이렇게 얘기하는 건 좀 그렇지만
<노예 12년>은 흥행작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지난 몇 년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들은

대부분 관객 20만을 못 넘겼습니다.
제가 정말 사랑하는 영화 <아르고>와 <허트 로커>가
각각 14만과 17만 정도의 관객을 모으는데 그쳤고
국내 상영 중에 수상을 하는 호재로
입소문이 엄청났던 <아티스트>가 그래봤자 12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고작 6만 명 정도가 봤습니다.
  
아카데미가 상업성을 싫어하든
사람들이 아카데미와 취향이 다르든
어쨌거나 그래왔고
<노예 12년>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이 영화에 참여하기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노예 12년>이 상을 받을지 아직 미지수이지만
"시상식이 좋아할 영화" 임엔 분명합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한국독립영화 몇 편의 진로(?)를 결정할 일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교수님들이
"이거 이거는 영화제용이니까 출품하고
이거는 영화제용 영화가 아니니까 바로 개봉하자"
라고 정리 하더군요.
<영화제용> 영화란 게 있나 봅니다.
아마도 그런 영화는 흥행대신 호평을 먹고 살겠지요.
  
<노예 12년> 영화를 직접 보면서는 더 불안했습니다.
이상하다. 스티브 맥퀸 정도면 더 엣지있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왜 이렇게 절제를 했을까.
상업영화를 잘 아는 브래드 피트라도 제작자 권한으로
이렇게 저렇게 좀 더 기교를 부리게 할 것이지
왜 그냥 이렇게 만들게 했을까.  
  
3.
신입사원이던 1990년대 중반쯤
난생 처음으로 인터넷이란 걸 접했습니다.
당시 회사는 정기적으로 해외 지사에 브로셔를 보내느라
시간과 비용을 허비하고 있었는데
문득 회사소개를 인터넷에 올리면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홈페이지라는 게 있는데 우리도 그걸 만들자"고 보고했다가
덜컥 그 일을 떠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엔 외주를 받아 홈페이지를 만들어 주는 업체가 몇 개 없었는데
그 중 제일 괜찮아 보이던 <다음> 이란 회사에 전화를 해서
일을 맡겼습니다. (열댓 명이 모여 있던 그 회사가 지금의 다음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다음이 보내온 첫 디자인은
그냥 잘 정리된 문서처럼 밋밋했습니다.
큰 예산을 쓰는 일인데 그런 결과물을 위에 보고할 수가 없어서
제가 다시 디자인을 해서 넘겼고
최대한 화려하게 애니메이션 효과도 넣고
있는 기술 없는 기술 다 동원해서
뭔가 휙휙 날아다니고 마구 움직이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회사 홈페이지는
가운데 커다란 지구가 막 돌아가고 그랬습니다. 하하
완성되니 정말 자기 컴퓨터 안에서 뭐가 막 움직이니까
임원들도 신기해하고 반응도 좋았습니다.
그땐 나름 뿌듯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끔찍한 디자인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받았던 시안이 소위 UI를 잘 고려한
고급스럽고 오래 지속될 디자인이었다는 걸
몇 달 지나서야 깨달은 겁니다.
결국 그 홈페이지는 수명이 짧았습니다.  
  
4.
며칠 전 어느 식사자리에 일행이 비싼 와인을 하나 들고 왔습니다.
한 병에 수 백만 원 한다는 샤또 페트뤼스라는 와인의 매그넘이었습니다.
신기해서 허겁지겁 마시려는데 웬일인지 저 빼고 다들 입만 대고 내려놓더군요.
앞에 앉은 친구의 설명에 따르면 아직 "맛이 안 열려서" 조금 기다려야 한답니다.
따라놓고 한참을 있어야 제 맛이 나온다고 하더군요.
심할 경우 한 시간이 지나도 맛이 열리지 않는 다나요.
저는 아직도 "맛이 열린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만
아무튼 그런 게 있다는 걸 그날에서야 처음 배웠습니다.  
  
5.
영화를 볼 때의 불안함과
영화를 보고 몇 시간 지나서의 마음이 달랐습니다.
  
감독이 비주얼 아티스트여서 그런지
영화의 모든 풍경과 구도와 장면이 출력해서 액자에 넣으면
미술작품이 될 정도로 아름다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듭니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도 그런 편인데 그의 씬들이 팝아트라고 치면
스티브 맥퀸의 장면들은 클래식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관객을 응시하는 것 같은 묘한 장면과
아주 정직한 롱테이크 씬이 몇 번 나오는데
여태껏 어떤 영화에서도 본적 없던 경험입니다.
  
제가 영화를 보는 내내
"이게 상업적으로 먹힐까. 어린 관객들이 이 묵직함에 점수를 잘 줄까" 하는
배급적인 생각에 꽉 찬 채로 보느라 그런 성찬의 즐거움을 놓쳤던 겁니다.
  
<노예 12년>은 제가 받았던 홈페이지 첫 시안 같고
그날 마셨던 평소 먹어보기 힘든 와인 같은 영화였던 겁니다.
시간이 지나도 잊지 못할 것 같고
시간이 지날 수록 맛이 열리는 걸 느낍니다.
  
너무 정직하게 기교 없이 흘러가는 것 아닌가 느꼈던 건
제가 지구를 휙휙 돌리는 촌스런 홈페이지 화면을
바랬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사실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어쩌면 죽을 때까지 기억할 수 있는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흥행작이 안될 수도 있다고 했는데
먼 훗날 누군가 제게
"살면서 너희가 어떤 영화에 관여했느냐" 물으면
굉장히 돈을 많이 벌어준 어떤 박진감 넘치는 액션영화를 자랑하진 못할 것 같지만
이 영화에 관여했노라고 꼭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 여러분께 먼 훗날 "살면서 너는 어떤 영화들을 봤느냐" 라고 물을 때
여러분의 대답도 저와 같을 거라고 믿어봅니다.  
  
6.
이 영화는 판씨네마가 수입을 했고
프레인 배급팀이 미국에 출장을 가서 보고 와서
프레인무비팀이 투자와 배급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시사회 때 관객들과 같이 봤습니다.
사실상 관여한 일 없는 관객의 입장인 셈이죠.
(그러고 보니 지금처럼 팀이 꾸려지기 전에 개봉한 <50/50>을 제외한
나머지 영화엔 제가 크게 기여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를 선택한 팀원들과
이 영화를 봐주시는 분들과
제가 처음 볼 때 놓쳤던 장면들에 감동받은 분들이

정직한 홈페이지 디자인이 뭔지
와인은 도대체 언제 열리는지도 모르는
저보다 몇 배 낫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ㅇㅈㅇ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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