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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여준영  08-21 | VIEW : 15,692
2008 국순전

주) 국순전 : 고려 고종때 문인 임춘(林椿)이 술을 의인화(擬人化)하여 교훈적으로 풍자한 가전체 설화.



  


그녀를 처음 만난곳은 이태리 밀라노의 한 허름한 마트였다.

"그런데 너는 어디서 왔니?"
타지에서 만난 친구에게 늘 하는 질문을 하자
그는 귀찮다는듯이 대답했다
"그런게 다 무슨상관이람 "

내가 다시 물었다.
"혹시 내가 너와 친해지기 위해서 알아야 할것이 있니 ?"
"그런거 없어. 대신 데이트 비용은 니가 내야해"
"에, 난 여행중이라 돈이 그렇게 많지 않은데"
"돈 2천원도 없단말이야 ?
주머니를 뒤져보니 다행히 그 정도 돈은 있었다
나는 그녀를 내 숙소로 초청했고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낼수 있었다
떠나던 날 그녀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는 어차피 다 고향을 떠날 운명이야.
한국에서도 우린 또 만날 수 있을거야"



귀국해서도 그녀를 잊을수가 없었다
한국에 와있다는 그녀를 혼자 찾아가려니 좀 쑥쓰러워
친구들에게 함께 만나자고 부탁했지만
모두 시큰둥했다

"싫어.  
이미 우린 친한애들 많잖아
이슬이,두꺼비, 조니, 밸런틴.."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가 찾아가지 않았는데도
그녀가 내 앞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신문과 방송에 뻔질나게 등장하더니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심지어는 그녀를 주인공으로한 만화책까지 나왔다.

처음엔 싫다던 내 친구들까지도
이제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버렸을 정도였다 .

그렇게 스타가 되더니
그녀는 변했다.
아주 심하게 변해버렸다

몇천원만 있어도 만날수 있던 그녀였는데
그 열배를 지불해도 여간해선 만나기 힘들었다

허름한 내 숙소에서의 데이트도 마다 않던 그녀가
근사한 레스토랑만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고향이 어디던 그게 무슨상관이냐더니
사람들에게 자신의 족보(1)와 주민등록증(2)"을 읽는 법까지
줄줄 외우게 만들정도로 도도해졌다.

누군가 먼저 그녀에게 허락을 받은뒤
그녀가 정한 순서에 따라 (3) 차례로 만나야했다.
그녀의 심리상태만
연구하는 사람(4)까지 생겨났다.

사람들은 점점 그녀 눈치를 보게 되었다
추우면 추울새라 더우면 더울새라 수시로 체크하고 (5)
조심스럽게 옷을 벗긴뒤 (6)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7) 금반지를 끼워주면서 (8)
바람피지 않을까 (9) 노심초사했다.

급기야 사람들은 그녀를 연구하고 공부(10)를 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쯤되면 그녀는
더이상 이탈리아에서 만났던 그 순진하고 소박하던
존재가 아니다
사랑스럽기는 커녕
스트레스고 상전이고 부담이다.


사람들은 이제 스타가 되기 전의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것 같다


나는 그녀를 가장 먼저 만났지만
이제 그녀를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은 아니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만났을때 들은
그녀의 이름은
비노(vino)였다.

어떤이는 뱅(vin)으로
어떤이는 바인(wein) 부르기도
하는 그녀의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은
와인(Win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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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트의 삐딱한 와인 사전


(1) 웬만한병엔 다써있는것 같은 용어들
Cabernet Sauvignon은  까베르네 쏘비뇽이라고 읽으며
그냥 포도이름이다.
프랑스에만 있는게 아니라 이태리에도 있고 호주에도 있다
싹이 언제나고 포도알이 크고 작고 빛깔이 어떻고 껍질이 얇고 두껍고 따위는
알필요없다. 그저 탄닌이 많은 포도품종이라는 것만 알면 충분하다
Chardonnay(샤르도네-화이트) merlot (메를로) Sauvignon blanc (소비뇽 블랑)
등도 들어봤을텐데 그것도 다 포도 이름일 뿐이니
병을 읽으며 스트레스 받지 말자


(2)와이너리(Winery)는 양조장이고 네고시앙(Negociant)은 술장사다
한국 레스토랑에 앉아 술마시는 입장에서 알 필요 하나도 없는 말들이다
샤또(Chateau)는 원래 프랑스 포도원이름인데
지금은 아무나 다 쓴다. 즉 아무의미없다고 봐도무방하다
그밖에 무시해도 될 용어로 크뤼(Cru)라는 용어도 있다.
역시 원래 뜻과 달리 품질이 좋다는 뜻으로 아무나 다쓴다
빈티지(Vintage)는 와인 생산년도인데 위스키처럼 오래된것이라고
무조건 좋은게 아니므로 아는척 하려고 맘먹는 순간 피곤해진다


(3)메뉴가 아닌 "리스트"에서  와인을 골라 주문하고 나면
그때부터 숨막히는 에티켓이 목을 죄온다
테이스팅(Tasting)이 아니라 테스팅(Testing)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제법 폼잡으며 잔을 흔들어 냄새도 맡고, 색도 보고
미리 한모금 마셔보고 그럴싸하게 OK 사인을 준다
향, 맛, 색깔 부케? 그걸 아는사람이 그렇게 많은가.
일반인에게 테이스팅의 가장 큰 목적은 상했는지 안상했는지 보는것이니
웨이터에게 "상한거 아니면 그냥 다 따라주세요" 하는게 더 쿨하다


(4) 소믈리에
우리가 와인의 위대한 거장이라고 알고 있는 소믈리에는
원래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담당하는 웨이터를 말한다
물론 그는 와인을 사고 저장하고 리스트업하고 추천해야하니
와인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한다.
역설적으로 얘기하자면
소믈리에의 존재는
마시는 사람이 와인에 대해 몰라도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반대로 소믈리에가 없어도 큰일 안난다
우리는 매일 바리스타가 없이도 커피를 잘 만 마시고 있잖은가



(5) 와인은 온도에 민감한 술이라 온도와 관련된 악세서리가 많다.
분명히 냉장 장치인데 냉장고라고 부르면 큰일나는 와인셀러(wine cellar)는
사실 필요하다. 그러나 비싼것을 살 필요는 없다
와인을 망치는 원인은 보관 온도가 조금 높고 낮고보다
온도의 급격한 변화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편의점 오징어포 매대 옆에
와인이 진열되어있겠는가.
그런면에서 와인셀러는정교한 기계가 아니라
그냥 항온기계라고 편하게 생각하는게 좋다.
온도에 있어서 와인셀러 이상의 정성은 포기하자
이를테면 와인온도계 (wine thermometer) 같은 것.
와인을 마시는 그동안의 온도 상승도 참지못해 내놓는
아이스버킷(ice bucket)은 집에 돌아다니는 아무 통이나 가져다
대용하면 된다


(6) 뚜껑 부분의 호일을 제거하는 호일커터 (foil cutter)가
따로 있는건 물론
코르크스크류(corkscrew)가 수십종류 있고
따는 방법도 그 스크류 종류만큼 많다(심지어 전자동 스크류도 있다)
집에서 마시면서 웨이터가 되고 싶다면 비싼걸 사도 좋지만
성능좋은 스크류 하나면 충분하다.
그것도 싫으면 스위스칼 하나면 다 해결 된다.


(7) 와인병 바닥의 침전물을 제거하고
와인을 공기와 접촉시기기위해
유리병으로 와인을 옮겨담는 과정을 디켄팅이라고 한다
옮겨담는 병이 디켄터(decanter)다.
호텔레스토랑 웨이터들이 물을 높은곳에서 불안하게 따르는것도
폼때문이아니라 바로 공기와의 접촉을 위해서 라고 하던데
그 물맛 더 좋아졌다고 느끼는 보통사람 별로 없다
디켄팅을 하면 와인이 그 짧은 찰나에 산화하고, 숨을 쉴수 있어서
맛이 좋아진다는 사실.....
을 뒷받침 하는 이론적 근거는 없다고 한다.


(8) 추석선물세트에 들어있는 와인악세서리를 보면 정체모를
링이 하나 들어있을 것이다.  드립링(Drip ring)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와인을 따를때 와인이 병목을 타고 흘러내리지 않게 하기위해
병에 끼우는 도구이다.
드립 링은 원래 테이블을 더럽히지 않게 하려고 만든것이다.
링을 쓰면 테이블은 안닦아도 되지만 그 링을 닦아야 한다
그냥 조심해서 따르자 마자 병목을 휴지로 닦아내면 된다


(9) 온도 다음으로 민감한게 공기라서
먹다남은 와인을 보관할때 쓰는 와인 세이버 (뚜껑을 이렇게 말한다) 중에는
와인병에 들어있는 공기를 빼내는 Vacuum saver라는것이 있다.
내경우에는 남은 와인은 그냥 원래있던 코르크로 막아
주방으로 가져다 놓고 요리할때 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열심히 공기 빼내도 일주일 안간다는데
헛수고 할필요 없지.


(10) wine tasting notebook 이라는 노트에는
샤또 이름과 포도품종과 수확년도등 와인에 관한 모든것을
기록해 나갈수 있다고 한다.
이 노트를 쓰게 될 정도면
와인은 애인이 아니라 직업이며
직업은 다 알다시피 기쁨보단 스트레스다


혹시 이 삐딱한 사전에 없는
이를테면 Trockenbeerenauslese, Egrappage,Fermentation,sulphur dioxide..같은
용어들 까지 기어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라면
둘중 하나일 것이다.

와인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와인보다
"와인을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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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 easy, hard, harsh, Oily, Opulent, Smooth aggressive, Spicy ..
이것은 와인의 맛을 표현할때 쓰는 용어들이다.

easy같은 아주 easy한 단어조차 와인과 관계되는순간 전혀  easy하지 않은
뜻을 갖게된다.
(참고로 와인맛이 easy하다는것은 가격대비 우수한 비교적 저가와인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십수년전 내가 처음 만난 그녀는
hard 하지도 fat하지도 easy하지도 opulent 하지도 않았다.

그냥
양주보다 달고 소주보다 품위있고 맥주보다 배부르지 않고
간단한 안주에도 어울리는 "편안한 애인" 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와인을 숙제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스타가 되기전의 그녀를 만날수 있었으면 좋겠다.



* 돈받고 판 원고입니다.




박상일
"스위스 칼 하나" 이 문구가 제일 가슴에 와 닿네요....와인도 술 인것을.. 08-21  
김동환
저는 언제쯤이 되어야 이렇게 내공의 깊이가 남다른 경지에 도달 할까요.. .

어깨 너머로 그저 배우겠습니다.. .

열심히 카피 해서 응용 하다 보면 언젠가는 저 자신만의 색깔이 묻어나는 창조가 가능 한 날이 오겠지요.. .

깊이 있는 글들, 감동 깊게 느낀 순간, 잊지 못할거에요.. .

훌륭한 글, 감사드리면서.. .

^^.. .
08-21  
목영훈
그녀.. 참 좋은 비유같습니다.. 몇몇의 남자들이... 늘 새로운 여자를 찾아다니듯이.. 몇몇의 그들은 늘 새로운 그녀를 맛보고 싶어서 새롭고, 늘씬하고, 유명한 그녀를 비싼 돈을 지불하고라도 맛볼려고 혈안이 되니까요.. ^^ 그러고 보면.. 두꺼비나, 이슬이같이 한명(?)에게만 정조를 바치는 한국 남성들은 참 멋진겁니다. ^^ 08-26  
정진수
오랜시간이라며 오랜시간 동안 와인 업계에서 일했는데..이 글보고 깊이 반성하고 갑니다. 처음 "그(저에겐)"를 만났을때의 설레임을 떠올리게 되네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헌트님께 맛좋은 와인 한잔 대접하고 싶네요! 02-06  
hunt
문외한이 주제넘은 글을 기고해서 죄송합니다. 와인 대접받을 기회가 빨리 오길 기다려 보겠습니다. 02-09  
777
와인잔에 대해서도 알려주시믄~ 03-10  
kimunan
프랑스에서도
이태리에서도
호주에서도...
여행하면서 현지 마트에서
현지인들이 가장 많이 사먹는
와인이 참 저렴하고 맛나더라구요.

좋은 공부되었습니다.
03-14  
hunt
777> 저기요. 제 글의 주제가 "종이컵에 마시면 뭐가 어때서" 인데요 .
kimunan> 대신 걔넨 비싼 소주 마시고 있을거예요. 쌤쌤.
03-24  
한진강
어떤 女인가 했는데 국순전이었군요 ㅎㅎ
국순전하니까 국순당 어원이 국순전인가 싶네요
막걸리도 유럽가서 스트레스가 되는 상상을 함 해보게 되네요
10-06  
이예슬
저는 .. 짜파게티하고 먹어본 적도 있어요! ㅋㅋㅋ 다들 저에게 참 이상한 사람이라고 ... 11-08  
김세환
ㅋㅋㅋㅋ 그놈의 신의 물방울 때문에!! 09-23  
김은진
아 공감합니다 신의물방울 때문이란것에ㅋㅋ 04-28  
임혜정
저 이글 특별히 좋아해요. 처음에 제목을 안 읽고 그냥 읽다가 나중에 와인인 줄 알고 혼자 막 웃었다는....................... ^^ 03-25  
황순임
전 와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너무 어렵거든요...
와인을 소재로 한 만화를 보면서 많이 친숙해지기는 했지만 어쩐지 알면 알수록 멀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사실 한번도 제대로 그 맛을 느껴보지 못했답니다
일단 한가지가 너무 궁금하기는 해요...정말 와인을 마시며 꽃향기 나무향기 같은 갖가지 향을 느낄 수 있나요?? 너무 궁금해요...과장이겠죠?? ㅋㅋ
07-24  
 LIST   
  와인 °[14]  여준영 08/08/21 15692
18   거실 °[12]  여준영 08/02/21 9499
17   To do or not to do that is question °[16]  hunt 07/04/10 7493
16   나의 20대 이야기 °[21]  hunt 06/12/19 17978
15   취업 프레젠테이션 잘하는 법 °[4]  hunt 05/12/08 12873
14   [머리말] 왼손엔 홍보 °[3]  여준영 05/11/20 5885
13   서평-디지털캐피탈리즘  여준영 03/09/15 3272
12   서평- 골뱅이를 요리하는 사람들  여준영 03/09/15 3655
11   서평-인터넷 광고 2000  여준영 03/09/15 2715
10   기업을 살리는 창의력 - 1996년 7월 매일경제 연재  여준영 03/02/04 3667
9   마라톤 ` 戰士  여준영 03/02/16 2747
8   국가경쟁력의 실체 - 1996년 7월  여준영 03/02/04 2613
7   여성경제 에세이 - 2001년 겨울  hunt 03/02/12 2914
6   문화를 사랑하는 당신을 위한 세번째 준비물 - 2001년 겨울  hunt 03/01/28 3019
5   코오롱그룹 스포츠마케팅 원고 - 1997년 가을 °[5]  hunt 03/02/01 5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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